마젠타에서, 블랙에서: 선명함의 삶
Exhibition Text, 《Magenta to Black》, 콘노 유키, Feb. 2024
한 송이 꽃을 들고 지나가다—사람이, 시간이, 기억이. 삶이란 밝음, 말하자면 양지에 어둠이 가끔 교차하다가 어느새 서서히 저물어 든다기보다, 어쩌면 채도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그때마다 다른 선명함을 뿜거나 잃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삶을 지내다 보면 눈에 띄거나 덜 띄는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앞에 있는 것은 무언가의 그림자에 가려진 것도 아니며, 어둠이 전체를 집어삼킨 것도 아니다. 명도, 이 밝고 어두움이 긍정성과 부정성으로 각각 나뉘는 한편, 채도는 그렇지 않다. 삶의 현재와 삶의 끝 또한 채도의 높고 낮음처럼 수평적이지 않을까. 일상 속에 선명히 보이는 것과 덜 보이는 것, 나뉘지 않고 서로 이어져 있는 상태에 만들어진 높낮이가 여기—우리 삶에, 미세한 요동과 함께 있다.
김나우와 플라네르의 이인전 제목은 《Magenta to Black》이다. 이 제목만 보면, 눈에 띄는 색감에서 고요하고 차분한 색감으로 점점 쇠퇴하는 한 방향만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회화 작업에서 마젠타와 블랙은 대체로 꽃과 조개의 형상을 그리는 데 사용되는데, 어떤 작품은 한 화면에 마젠타와 블랙이 함께 (사용되어) 있기도 한다. 여기서 색감의 대비가 보여 주는 것은 쇠퇴라는 한 방향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이동이다. 작품에서 이동은 선명함과 덜 선명함, 현실과 비현실, 더 나아가 삶과 죽음 사이를 수평적이고 순환적으로 오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본인의 작업을 ‘현실 비틀기’라는 말로 설명할 때, 그것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태도와 다르다. 바로 ‘비틀기’라는 몸짓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느슨히 이어 주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김나우의 회화 작업에서 마젠타와 블랙, 꽃과 조개의 이미지는 장식적인 패턴과 구체적인 형상 사이를 오간다. 이 풍경이 그려진 곳에서 플라네르의 꽃/식물 작업 또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이어 준다. 꽃은 장식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루고 보는 친숙한 소재인데, 전시장에서 플라네르의 작업은 편안한 곳이자 낯선 곳을 연출한다. 김나우의 회화와 더불어 플라네르의 식물 작업은 현실 비틀기를 통해서 나타난 경계의 풍경을 전시장에 그려내는데, 현실을 비틀어서 나온 풍경은 과거와 미래 시점이라는 가상을 현실과 이어주기도 한다. 꽃과 조개라는 소재는 그 자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예컨대 꽃은 ‘축하’를 상징하듯이, 특정 메시지와 대상을 연결하여 나타난다. 그런데 상징성은 대상과 의미를 단단히 묶어 두기만 하지 않는다—과거나 미래로 전달되는 마음을 담기도 한다. 꽃에 소망을 빌거나 애도하는 마음을 담을 때, 그 마음은 지금 이곳에서 가깝거나 먼 미래로 바쳐진다.
꽃의 선명함에 우리가 끌리는 이유가 있다면, 상대방의 마음이나 상징적 의미 못지않게 과거와 미래로 향하는 생기가 선명함에 담기기 때문이다. 선명함의 생기를 꽃에 본다면, 우리는 조개에 아득함의 생기를 보고 듣는다. 설령 껍질만 남았다 할지라도, 설령 껍질을 열지 않았더라도, 여기에는 생명의 숨 소리가 들린다. 해변에서 주운 조개껍질에 우리가 듣는 것은, 머나먼 과거가 지금 이곳으로 밀려오는 물결, 그 요동침이다. 그것은 부재를 통해 전해 듣는 생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 너머의 생기이다. 껍질에 쌓인 묵묵함은 그 안에 생기를 배태할 뿐만 아니라 머나먼 과거, 생명체의 시초까지도 담는다. 육지에서 바다의 소리를 들으면서 선명함과 덜 선명함—바꿔 말해 고요함 사이를 오가면서, 삶은 그려진다.
삶을 그린다는 것은, 삶이 아니함—곧 부재, 죽음—을 함께 그리는 것이다. 마젠타의 어원을 보면 1859년에 있던 마젠타 전투와 이 색깔이 발견된 시기가 겹친다. 삶과 죽음 끝에 찾은, 황폐한 곳에 탄생한 승리가 이 색깔에 담겨 있다. 마젠타와 블랙은 전쟁이 일어난 땅에 삶과 죽음이 같이 흐르는, 그런 색이다. 흑백은 존재가 소멸한 상태가 아니라, 그 너머에 아득함을 떠올리고 시간을 고요히 보내는 힘을 머물도록 한다. 그 묵묵함에 우리는 호흡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빼앗긴다—그러면서 곧 선명함이 되어 돌아온다. 비현실성,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숨결이 꽃과 조개에 보이고 들리듯이, 현실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마젠타에서 와서 마젠타에 머무르고, 블랙에서 와서 블랙에 머무르는, 이 사이에서(from/on)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 그것이 삶이다.